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문단 편집) === 사후 - 나치의 보복 === || [youtube(V0tXIGerj7I)] || || 하이드리히의 장례식 || 하이드리히가 사망하자 프라하 성의 명예의 궁전에 안치된 하이드리히의 관에 꽃과 화환을 바치기 위해서 보호령 전 지역의 당국자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하이드리히의 관은 카를 다리 위의 궁전에서 중앙 철도역으로 옮겨졌다. 친위대 및 질서경찰 상급대장인 [[쿠르트 달루게]]가 하이드리히의 관이 베를린으로 운구될 때 동행했다. 이 사람은 체코의 리디체 마을 주민을 학살한 인물로 훗날 전쟁이 끝나고 이 죄를 물어서 1946년 프라하에서 처형되었다. 친위대에 4명밖에 없던 [[상급대장]]의 최초 역임자이며 [[에밀 마우리스]]와 함께 친위대의 창설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자이다. 하이드리히의 장례 절차는 베를린에 신설된 제국 수상 관저에서 치러졌고 배경 음악은 [[히틀러]]가 가장 좋아하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지크프리트의 라인 기행"이 연주되었다. 1942년 6월 9일 히틀러는 죽은 하이드리히를 찬양하면서 훈장을 수여했고, 특히 하이드리히의 두 어린 자녀들을 만났다. 이 훈장은 1942년 2월 11일에 만들어진 제3제국 최고 영예의 훈장이었다. 그리고 히틀러는 하이드리히에게 훈장을 선물하면서 추모 연설을 했다. > "나는 이 죽은 이에게 몇 가지 할 말이 있습니다. 그는 가장 훌륭한 국가사회주의자들 중 한 사람이었고, 독일 제국 사상 가장 강력한 보호자들 중 한 사람이었으며, 제국의 모든 적들의 가장 강력한 적수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제국을 방어하고 지켜내기 위해서 순교자로서 쓰러져갔습니다. 당의 지도자이자 독일 제국의 지도자로서 나는 친애하는 동지 하이드리히 당신에게 최고 영예의 훈장을 수여함으로써 보답을 드립니다. 당신은 당 동지 프리츠 토트[* '''프리츠 토트'''(Fritz Todt, 1891년 9월 4일 ~ 1942년 2월 7일)는 독일의 건축기술자 및 [[나치]]의 고위 인물로, 나치당 내각의 군수탄약성 장관을 지냈다. 또한 1938년 [[아우토반]] 건설에 참여하였고, 외국인 강제노동 징발 조직인 토트 조직(Organisation Todt)의 창립자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였다.] 이후 두 번째로 이 상을 받게 되는 사람입니다." 히틀러가 "친애하는 동지 하이드리히" 라는 표현을 사용할 정도로 하이드리히는 살아 생전에 히틀러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하이드리히의 관은 베를린 도로를 지나 인발리덴 묘지로 옮겨져 1813년에서 1815년의 해방전쟁 때에 [[나폴레옹]]에 맞서 싸운 보병 연대장 타우엔치엔 폰비텐베르크 백작의 무덤 옆에 전사로서의 명예와 함께 묻혔다. 영국 언론은 이 장례식을 '''"화려한 시카고식의 갱스터 장례식"'''이라고 불렀다. 하이드리히를 위해서 건축가 빌헬름 크라이스와 아르노 브레커가 디자인한 기념묘가 세워질 예정이었으나,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상황이었기 때문에 만들어질 수 없었다. 나치 독일은 하이드리히의 죽음에 대한 보복으로, 하이드리히가 사망한 체코의 리디체(Lidice) 마을을 불도저로 파괴하고 16세 이상의 남자 196명을 모두 처형한 뒤에, 여자와 아이들은 강제 수용소로 보냈다. 그렇게 수용소로 끌려간 105명의 아이 중 88명이 죽고 17명만이 살아남았다. 전개를 보면 알겠지만 당연히 이건 말도 안 되는 행위다. 연좌제 자체도 말이 안 되지만 무엇보다 이 마을 사람들이 하이드리히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없다. [[http://en.wikipedia.org/wiki/Lidice|위키피디아 링크]] 레자키에서는 SOE의 라디오 장비가 발견되었다는 이유로 50명의 마을 주민이 학살되고, 마찬가지로 마을 전체를 파괴하였다. 또한, 암살범들이 성당 지하실에 피신하는 것을 용인했다는 이유로, 체코슬로바키아 [[정교회]]의 수좌주교인 프라하 대주교 고라스트 2세(Svatý Gorazd II., 이후 1961년에 시성됨) 및 사제 2명을 총살하고, 550여명의 정교도를 체포, 처형하고,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내에서의 정교회의 활동을 금지, 성당을 폐쇄함과 동시에 보호령 내의 정교회 성직자들을 강제수용소에 수감시켰다. 여름까지 지속된 독일의 보복행위로 1,500명 가량의 민족주의자들, 전직 장교, 지식인, 공산주의자 등으로 구성된 저항조직원들이 살해당했다. 또한, 3천명의 체코 유대인들을 테레지엔슈타트의 절멸수용소에 수감시키는 한편, 베를린에서는 [[수정의 밤]] 때처럼, "분노한 독일인들의 자연스러운 봉기"로 150명 가량의 유대인들이 살해당했다. 이 때문에 연합군의 첩보작전에 큰 차질이 생겼다. 본래 [[에드바르트 베네시]](Edvard Beneš) [[체코슬로바키아 망명 정부]] 대통령은 하이드리히 이후에도 나치 점령정부에서 교육 및 국민계몽 장관을 맡고 있는 전직 체코군 장교 에마누엘 모라베츠(Emanuel Moravec)와 하이드리히의 후임자, [[카를 헤르만 프랑크]](Karl Hermann Frank)를 암살할 생각이었지만, 하이드리히 암살로 촉발된 독일의 보복으로 인해, 점령지 주민들이 겁을 집어먹고 협력하기를 극도로 꺼리자 더 이상의 암살은 감히 기도하지 못했다. 그래서 영국 첩보부는 방침을 암살에서 납치로 바꾸게 됐다. [[http://flager8.egloos.com/2737524|관련 글]] 또한 하이드리히 암살에 대한 나치의 대규모 보복은 종전 후 체코슬로바키아 내의 독일인들이 [[전후 독일인의 추방과 도주|독일로 추방되는 데]]에도 기여했다. 하이드리히 암살 전까지만 해도 체코슬로바키아 망명정부의 공식 입장은 "체코슬로바키아를 수복하더라도 미우나 고우나 독일계와 화해해야 한다"는 것이 공식 입장이었다. 사실 체코 또한 나치 부역 행위로 시선이 곱지는 않았다. 그런 관계로 종전이 되자 수데테란트에서는 독일인에 대한 폭행, 학살 등 보복행위가 잇달았다. 이 보복행위들은 소련군과 정부가 들어서서야 수습되었지만 그 뒤에는 추방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쨌거나 [[뮌헨 협정]] 전까지만 해도 수백 년 동안 부대껴 살아온 같은 나라 국민이기도 하고, 그 숫자도 1,2만 정도도 아닌 체코슬로바키아 1300만 인구 중에 300만이 넘으니 300만이 넘는 자국민을 없애버리는 것도 망명정부에게는 큰 부담이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나치의 보복을 목도한 망명정부는 독일인과의 공존에 대한 기대를 접고 일부 필요한 인물들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조리 추방하는 것으로 방침을 굳히게 된다. 망명정부의 의도와 무관하게 소련은 전후 독일인들을 거의 다 추방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어차피 전후 독일인의 추방 자체는 필연이었다. 다만 독일인 거주지역 전체에서 무차별적인 보복 학살이 진행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 때 나치의 보복학살이 없었다면 독일인들의 추방 자체는 좀 더 온건하게 진행됐을 것이다. [[파일:N4XOYLB.jpg]] 하이드리히의 관을 지켜보는 [[하인리히 힘러]]. [[파일:external/www.i-sn.cz/heydrichova-posmrtna-maska.jpg]] 하이드리히의 [[데스마스크]] [[파일:attachment/reinhard09.jpg]] [[파일:attachment/reinhard10.jpg]] [[파일:attachment/reinhard11.jpg]] [[파일:attachment/reinhard12.jpg]] 하이드리히를 기리던 추모비. 물론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나서 죄다 박살났다. 하이드리히의 목재 묘비는 1945년에 사라져버리고 무덤에는 현재 아무런 표지도 없다. 전쟁 전에 묻혔고 그의 가문이 건재했기 때문에 지금도 관리는 되고 있다..같은 이유로 명문가 출신 나치 전범들은 시신이 화장되어 뿌려졌더라도 가문에 별도의 가묘가 만들어져 있다. 하이드리히의 [[데스 마스크]]만이 나치가 하이드리히를 기리기 위해서 발행한 우표에 존재할 뿐이다. 하이드리히 사후 국가보안본부장에는 힘러에 충직한 [[에른스트 칼텐브루너]]가 임명되었고, 1943년 1월 말에 정식 취임했다. 그리고 하이드리히가 계획했던 학살을 본격적으로 집행한 게 바로 칼텐브루너다. 나치 패망 이후 리디체 마을은 복원되었지만 원래대로 지금도 작은 마을이다. 2022년 인구가 600명도 안된다. 체코나 슬로바키아에선 이 학살을 잊지 말자고 리디체라는 이름을 가진 마을이 여러 개 생겨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